9월 18일 주일설교요약 및 주보

가버나움의 4인조

Foursome In Capernaum【누가복음 5:17-26】 2022.09.18(주일)

서론

본문의 말씀은 마태복음 9:1-8절과 마가복음 2:1-12절에도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 기사는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마태복음 17장에서는 가버나움에서 성전세에 대한 교훈을 하셨습니다. 성전세를 왜 가버나움에서 언급 하였을까요? 가버나움은 ‘코페르’와 ‘나함’의 합성어입니다. 선지자 나훔의 고향이며 나훔의 마을(땅)이란 뜻입니다. 나훔은 위로란 뜻이니 가버남움은 위로의 마을이란 뜻입니다. 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을까요?

가버나움에서 코페르란 단어를 볼 수 있습니다. “코페르”란 노아 방주를 만든 나무입니다. “코파르”란 말에서 왔으며 그 뜻은 “속죄나 속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죽을 수밖에 없던 죄인들이 속죄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으니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가버나움은 위로의 마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가버나움의 중풍병자를 예수님에게 데리고 갔던 4인조 친구들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1. 믿음의 역사

믿음이란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이론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믿음은 행동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중풍병에 걸려 누워 있는 사람을 위하여 4인조는 위로의 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누워있는 사람의 침상을 들고 일어나 행동하였습니다. 그들은 친구가 움직이지 못하는 친구의 몸이 되어 주었고 발이 되어 주었습니다.

행동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모일 때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아브라함이 믿고 행동으로 옮겼을 때 인정받았습니다. 라합도 하나님을 믿고 행동으로 옮겼을 때 그 믿음이 인정받았습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행동으로 옮길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음의 역사가 없으면 온전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중풍병자를 침상에 누워 있는 상태로 예수께 데리고 온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가리켜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일가 친척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친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쨋든 그들은 믿음의 행동을 보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마가복음에서는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에서는 그들이 4명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누구인지는 몰라도 4인조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2. 소망의 인내

그들은 병자를 데리고 예수님이 계신 곳끼 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서 예수님 앞에까지는 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로 가는 길을 조금씩 양보하면 좁은 길을 만들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의 벽은 높기만 했습니다. 아무도 한치의 양보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 4인조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문이 막히고 길을 만들어주지 않자 그들은 지붕을 뚫어 문을 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지붕도 뚫을 수 없었다면 아마도 터널(땅굴)을 뚫었을지도 모릅니다.

성경시대의 이스라엘의 집들은 대개 지붕을 걷어낼수 있도록 지었습니다. 그러나 지붕에서 문을 구한다는 것은 비상식적인 일입니다. 사람들이 집안에 많은데 지붕을 뜯어 문을 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4인조는 난관에 봉착했지만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소망으로 절망을 뛰어 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들은 소망을 가지고 끝까지 될때까지 인내하였습니다. 믿음과 소망은 논리가 아닙니다. 믿음과 소망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1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믿음과 소망은 예수 앞으로 돌진하려는 파격적인 행동을 일으킵니다. 오직 예수님을 직접 만나기 위하여 어린아이처럼 지붕에 올라가고, 오직 예수와 손을 잡기 위하여 정신병자 처럼 지붕의 기왓장을 벗기고, 오직 자기의 친구를 예수 앞에 데려가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수근거리고 손가락질하며 쳐다보는 그 비웃음과 욕설과 비판 한 가운데서 유유히 침상에 줄을 달아 내린 것입니다.

가버나움의 4인조는 일할 사람이 안보일 때 자기들이 직접 손발을 걷고 나섰고 집안이 혼잡으로 가득차 있을 때 지붕으로 올라갔고 지붕을 뜯어 길을 낸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과 소망을 보시고 병자를 용서하시고 치료하신 것입니다.

3. 사랑의 수고

가버나움의 4인조의 수고는 자기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붕을 뚫고 자기들이 내려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욕을 먹은 것도 병자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조롱을 받은 것도 병자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고생을 한 것도 병자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친구가 예수 앞에 도착한 것을 지붕에 뚫어진 구멍으로 얼굴들을 내밀고 만족스럽게 내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입에서 유명한 선언이 나왔습니다.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눅 5:20). 마태복음에서는 “소자야”라고 기록하였고, 마가복음에서도 같은 말을 기록하였습니다. 오직 누가복음에서만 “사람아”라고 기록하였습니다. 4복음서 중에 사람아라고 부르신 것은 누가복음 뿐입니다.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순수한 인간성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사람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더구나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한 복음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장 존귀한 호칭 “사람아”라고 불러 주신 것입니다. 이제 너는 참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예수님의 인간선언이었습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4인조는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중풍병이 낫고 죄사함을 받고 사람다운 사람이 되었으니 남의 집 지붕 뜯은 값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4인조는 모든 것을 책임지고 사랑의 수고를 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들에게서 우리는 순수한 사랑을 보게 됩니다. 오직 사랑을 동기로 하는 순수한 행동이 인간이 되게 하는 길이고 이것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칭찬받은 것도 바로 믿음의 역사와 소망의 인내와 사랑의 수고입니다.

결론

병자의 침상을 번쩍 들고 일어서서 행동하는 믿음의 역사,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병자를 예수께서 고쳐주실 때까지 희망을 가지고 인내한 그들의 소망의 인내, 오직 사랑을 바탕으로 순수한 수고를 했던 사랑의 수고, 이러한 세 가지 요소는 기적을 일으키는 씨앗이 되지 않았을까요?

다음의 질문에 답해 봅시다.

(1) 4인조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2) 4인조의 소망은 어떤 소망입니까?

(3) 4인조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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